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르트 발트하임 (문단 편집) === 대통령 선거: 탄로난 [[나치]] 시절의 과거 === || [[파일:external/ww2gravestone.com/image037_19.jpg|width=100%]] || || 왼쪽에서 두번째가 발트하임, 맨 오른쪽의 인물은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아르투어 플렙스]]'''이다. || 1985년, 오스트리아의 유력 주간지 "프로필"의 편집부국장이자 발트하임이 몸담은 [[오스트리아 인민당]](Österreichische Volkspartei, ÖVP)의 컨설턴트였던 알프레트 보름이 발트하임의 과거를 밝혀냈다.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굵직한 [[스캔들]]을 연달아 발굴해냈던 보름이 파낸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자랑스러운 아들 쿠르트 발트하임이 '''[[나치]], 그것도 민간인 학살에 깊숙히 관여한 [[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자였던 것이다'''. 그의 소속이 비록 [[슈츠슈타펠|SS]]가 아니라 [[독일 국방군]] 소속 육군이었지만, '''[[국방군 무오설|국방군 역시 전쟁범죄에 자유롭지는 못했다.]]'''[* 물론 나치군의 전쟁범죄 비율상으론 일반 친위대>무장 친위대>국방군이지만, 조직 규모는 그 반대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건수로 따지자면 국방군도 만만치 않은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물론 국방군에 복무했다는 것만으로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국방군으로서 동부든 서부든 전선에서 전투부대였거나 후방 지원부대였을 수도 있고 방관이라는 측면에선 자유롭지 못하지만 모든 국방군이 직접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발트하임이 복무한 부대는 주로 발칸 전선에서 활동하며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의 점령지에서 [[빨치산|파르티잔]]을 상대했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잔혹한 범죄행위의 가해자이기도 했다. 발트하임은 이런 부대에서 간부로 활동했으니 당연히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출간된 그의 자서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대학교 시절 악명높은 [[SA|나치 돌격대(SA)]]의 기마대원이었다. 뒤이어 진실들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그는 [[1941년]]에 부상을 입은 후에는 독일 육군 E집단군[* 원래 그리스에 주둔하던 독일 제12군이었다. 전쟁 중후반부에 E집단군으로 승격되나 명칭상의 승격일 뿐이었고 종전시까지 야전군규모를 유지했다. 전쟁 말기에 발칸반도 남부에서 [[알바니아]], [[보스니아]]를 거쳐 북쪽으로 후퇴했고 이후 [[영국군]]에 항복했다.]으로 배치되었고, 그 곳에서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통역장교와 통신장교, 그리고 그 후에는 정보장교와 탄약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성공적인 작전 수행"으로 독일 육군에서 포상도 받았으며, 역시 [[파시스트]] 정부였던 [[크로아티아 독립국]][* 이름과는 정반대로 [[추축국]]의 [[괴뢰국]]이었으며, 실권자였던 [[안테 파벨리치]]는 자신이 지도하는 극우 사이비 종교 단체인 [[우스타샤]]를 이용해 '''그 [[크메르 루주]]조차''' 능가할 정도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 정부의 훈장까지도 받았다. [[1944년]]에는 전선의 [[소련 육군]]에게 투하할 [[반유대주의]] [[삐라]]를 직접 검사하고 허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부대가 와해되고 패망이 확실시되자 [[영국 육군]]에 항복했다. 발트하임 진영은 즉각 반박했지만, 이제는 국제 유대인 회의, 그리고 유명한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 등 전 세계의 반나치 조직들이 발트하임과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에는 [[자승자박|발트하임 자신의 책임도 컸다.]] 발트하임은 "민간인이 살해당하는 줄은 몰랐다"고 발뺌했지만 그 직후 그의 사무실이 '''처형장 바로 옆이며 처형장 쪽으로 창문까지 나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추가로 그의 근무지가 '발칸의 아우슈비츠'라고까지 불렸을 정도로 악명 높은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얼마나 잔혹한 곳이었는지 이곳을 방문한 '''나치 관리들과 SS 병사들조차''' 그 참상에 경악할 정도였다. 자세한 사항은 1944년 4월부터 12월까지 이 수용소의 지휘관을 역임한 [[딘코 사키치]] 문서 참조.]에서 고작 35k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대해 발트하임이 "나는 나치가 아니다"[* 물론 이게 말이 안되는게 SA 돌격대 기마대원은 나치당 소속 정치 깡패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폭력행위의 주축인 SA가입자라는 것으로 이미 확실한 나치이다.] 라고 항변하자 분노한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 알프레트 지노바츠는 "그렇다면 발트하임이 탄 말만 나치라 믿어주자"고 빈정거렸고, 발트하임의 반대파는 유세기간 내내 나치 시절 독일 육군 [[정모(의복)|정모]]를 쓴 목마를 유세장에 끌고 다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신의 나치 부역 전력뿐만 아니라 아내인 엘리자베트와 처제, 장모, 장인을 비롯한 아내의 친정 일가 사람들의 나치당 협력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발트하임 부부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1987년 4월에 미국 법무부가 쓰고 1994년에 발표한 204쪽 분량의 발트하임에 대한 내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발트하임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유대인을 포함한 민간인을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대량으로 추방한 행위와 반유대주의 선전[* 1944년에 발트하임은 반유대주의 선전 전단을 소련 전선 뒤에 투하할 것을 검토하고 승인했는데, 그 중 하나는 "유대인 전쟁은 그만하고 '''유대인을 죽이고 오십시오.'''"라는 말로 끝났다고 한다.]을 넘어서 심지어는 '''연합군 포로에 대한 학대 및 처형, 인질 및 기타 민간인에 대한 보복 처형에까지 가담했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발트하임이 직접 포로와 민간인을 처형한 것은 아니고, 자신의 부하들이 전술한 만행들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거나 아예 직접 처형을 명령한 것이었다고 한다.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94/03/13/us-report-ties-waldheim-to-atrocities/f3ad54c8-284e-4150-a54f-81dd0be1c03a/|1994년 3월 13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중]] 그리고 이후 1988년 2월 18일에 6명의 군사 역사학자들의 국제 위원회는 연구 끝에 발트하임이 부당하다고 확실히 인지한 것을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에 대해 반대, 항의 또는 중재의 징후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여러 차례 이러한 행위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결론지었다. 이 사태로 모두들 발트하임이 낙선하고 오스트리아 정계에서 추방당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러한 예측은 빗나갔다. 그동안 오스트리아는 [[안슐루스|1938년 자신들이 나치독일에게 강제 합병당했던 것을]] 내세워 나치 청산에 관한 모든 것은 이웃나라 독일만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피해자 코스프레|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반복하는 이른바 피해자의 신화]]"'''를 지켜왔다. 게다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던 오스트리아 내 [[반유대주의]]도 한 몫 했다. '''유태인'''인 전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유태인 단체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에 대해 "오스트리아는 외국의 유태인 놈들이 누가 우리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간섭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어대며 발트하임을 변호했다.[* 후일 이 사건은 비젠탈이 오스트리아 고위 관료들의 나치 전적을 까발리면서 비젠탈과 크라이스키 간의 감정싸움으로 격화됐고, 결국 크라이스키는 [[체코]] 정보부의 문서를 근거로 비젠탈이 [[게슈타포]]의 끄나풀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니 [[위조]] 문서로 밝혀졌다. 결국 크라이스키는 망신만 잔뜩 당했을 뿐만 아니라, 분노한 비젠탈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 바람에 손해배상까지 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지지율 우세를 꾸준히 지키면서 1차 선거에서 49.6%로 과반에 근접한 득표를 하였고, 2차 선거에서 같이 결선에 오른 사회민주당 슈타이어 후보를 7.8%차이로 제치고 53.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5년 내내 오스트리아를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발트하임 사건은 오히려 국내적으로는 오스트리아를 우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외국 단체들이 쉴새없이 오스트리아를 비판하는 것을 내정간섭으로 인지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오히려 우파로 기울어져 갔고, 이는 1980년대 후반 캐른텐 주지사 외르크 하이더를 비롯한 극우파가 성장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1999년에 [[오스트리아 자유당]]이 국민당과의 연합정권 결성에 성공하면서 정권을 창출하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물론 이 사건만이 오스트리아 자유당을 약진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경제 위기 및 사민당과 국민당이라는 양대 정당의 거듭된 실책이 주된 원인이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가 수십 년간 내세우던 "[[피해자 코스프레|피해자의 신화]]"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고, 오스트리아 합병 50주기를 맞이한 1988년부터 시작된 흐름은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